숙적1
매년 5월이면 한국,일본의 카톨린 신자들이 동경에서 쾌속선을 타고 3시간 걸려 외딴섬으로 모여든다(줄리아제)
임진왜란때 고니시유키나가가 철수하면서 조선인 포론였던 예쁜소녀(양반규슈)를 일본으로 데리고가서 양녀로 삼고 카톨릭세례를 받게한다.
세키가하라전투에서 고니시유키나가는 이시다미쯔나리 에 편을들어 져서 처형당한다. 당시의 관행에따라 줄리아는 도쿠가와이에야스의 하녀가 됨.
줄리아를 보고 반한 이에야스는 숙청을 들라고 하지만 거절하자 섬으로 유배를 시킨다. 줄리아는 섬사람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주며 여생을 보내다 죽는다. 줄리아는 일본카톨릭에서 성인의 반열에 올라 줄리아제는 3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 - 상인출신이자 카톨린신자이다.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배려로 다이묘자리에 오른 인물.임진왜란때 어떻게 해서든 살육을 피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려 일본군의 정보를 조선측에 흘리기도한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지만 이 정보를 불신한 이순신장군은 조정의 지시에 따르지않아 탄핵을 받게된다.
히데요시가 암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있는데 그것은 측근이였던 고니시집안이 국제무역을 했었고 약종상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동남아에서 독약을 쉽게 구입할수도 있었고 독약으로 향을 피워 향을 맡게하여 임진왜란을 강행하던 도요토미히데요시를 죽였다는 설이다.
카토 키요마사 - 철저한 사무라이로서 고니시와는 라이벌관계이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서둘러 점령하려 하였으며 이순신장군을 죽이기위해 자객을 보내지만 고니시는 이순신장군이 있어야 전쟁을 끝낼수있다고 생각해 부하를 보내 그 자객을 죽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히데요시는 이시다미쯔나리&고니시에게는 칭찬을 아끼지않고 카토키요마사에게는 일부러 질투를 유발시켜 자기측긴이 사이가 가까워지는것을 경계했다.
1575년 나가시노전투에서 오다노부나가는 도쿠가와와 힘을합쳐 다케다 가쯔요리를 무찌르고 일본실권을 장악한다.
일본통일직전 서쪽지방의 거대세력인 모리 테루모토를 치기위해 히데요시를 출진시키고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노고를 위로하기위해 성대한 잔치를 나흘간 아즈치성에서 베풀었다. (이에야스는 5월15일 아즈치성도착. 5월18일부터 나흘간 노부나가를 만남) 이에야스도 스루가 지역을 영지로 내려준것에대한 감사인사를 하기위해왔었으며 그 자리에서 노부나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가서 히데요시를 지원할계획을 밝혔다.
이에야스에게도 미카와의 오카자키에 돌아가면 즉각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아케치미츠히데에게 히데요시를 도우라는 명을 내리고 노부나가도 출진하기위해 6월1일 교토의 혼노지에서 머물고있었다. 6월1일 이에야스는 전날 쿄토에서 사카이로 와서 부자상인인 아마이쇼큐&쯔다소규의 저택에서 머물며 다도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술자리는 밤늦게 끝나고 이마이쇼큐는 도쿠가와에게 내일아침일찍 이곳을 떠나라고 몰래 귀뜸해준다. 그리고 다음날 6월2일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다. 사카이의 상인들의 정보력에 놀라며 도쿠가와는 최대한빨리 오카자키로 돌아가 군대를 끌고 쿄토로 진격하기위해 서둘렀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모리군과는 휴접협정을 맺고 오다군의 다이묘들에게 힘을보태달라 연통을 보내며 전쟁은 히데요시가 승리. 아케치미츠히데는 잠도 못자고 도망가다 대나무숲에서 현상금을 노리는 농민들의 죽창에 찔려 6월16일 한 농부가 아케치미츠히데의 목을 히데요시에게 가지고와 결국 효수됬다. 이후 노부나가의 뒤를 이을 계승자를 가리기위해 기요스성에서 히데요시,시바타가쯔이에,노부나가의 둘째,셋째아들이 모인가운데 둘째는 어리석고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아 시바타는 셋째를 내세운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같이죽은 장남의 어린아들 산보시를 꼭두갂시 후계자로 올린다. 이에 불만을 품은 시바타는 1583년 히데요시와 전쟁하여 패하면서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이흔 실제 후계자가 되었으며 오다가문의 가신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기위해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한다.히데요시는 오사카성 축성업무를 이시다미쯔나리,고니시유키나가에게 시켰다.(히데요시가 오다가문의 권력과 재산을 독점.)
일본의 실권자가 된 히데요시는 통일직전의 큐슈정벌 전에 눈에 가시였던 도쿠가와를 자기 휘하로 들이기위해 동생과 어머니를 보낸다. 결국 휘하로 돌아와 안심하고 큐슈정벌을 떠난다. 큐슈정벌후 기독교금지령을 내린 원인은 남만인이 하카타에서 신사와사찰 파괴,승려박해,입신강요, 인도에 일본인 수출하였기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철저한 카톨릭 금지령을 내리긴 했지만 기독교포교가 남만무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어 천천히 태도를 바꾸어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하게 봐주는척을 하지만 이후 임진왜란때 크리스챤들을 조선에 보내 죽게한다. 큐슈에서 승리하고 돌아온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동쪽의 호조씨를 정벌하라는 명을 내린다. 호조씨를 정벌후 일본은통일된다. 승리하고 돌아온 이에야스에게 공을 치하는척하면서 이에야스가 20년간 다스려온 5개의 쿠니를 빼앗고 대신 호조씨가 다스리던 동쪽의 에도의 영지를 준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땅을 몰수하고 호조씨가 다스리던 영토에서 주민들에게 반감을 얻게 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덤덤히 서둘러 에도로 옮겼다.
큐슈정복이후 히데요시는 여러장수들에게 포상으로 영지를 나누어준다. 시바타가쯔이에,도쿠가와와 손을 잡았던 사쯔사 나리마사에게 큐슈의 히고지역(쿠마모토)를 주었다. 나리마사는 지도자에게 반항하는 기질이 있어서 히데요시는 나리마사가 실패하기를 기다렸다가 히고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히데요시는 군대를 보내 반란을 제압하고 나리마사를 유폐시켰다 자결시킨다. 나리마사의 영지는 다시 둘로 나눠 북쪽지역(쿠마모토)은 카토키요마사에게 주고 남쪽지역(우토성~그리스도인의 섬이라고 불린아마쿠사시마까지)는 고니시유키나가에게 영지배분한다. 전국시대 하극상이 일어날것을 우려해 하극상의 불씨를 잠재우려면 더욱 큰 전쟁을 계속 해야만했다. 그래서 조선,명나라 정벌을 계획한다. 카토키요마사는 쿠마모토에 쿠마모토성을 7년간 걸쳐 1607년 완공했다. 쿠마모토성은 오사카성,히메지성과 함께 3대 일본명성으로 불리고 카토키요마사가 설계하고 우리나라 울산성을 축성한 사람들이 축성에 도움을 주었다고 함.영화 라스트사무라이의 마지막전투신 촬영장소로도 유명. 히데요시가 고니시와 카토에게 이쪽으로 영지를 준이유는 조선침략시 가장 싸움에 뛰어나고 신뢰한 한사람이 카토였고 사카이의 고니시집안은 조선인삼을 수입해왔기때문에 조선정세를 잘 알고있었기때무이다. 영지를 하사받은일로 인해 두사람은 출세하게된다.
반년후에 고니시는 우토성을 보수하고 다시 축성하기위해 옛토호들과 무사들에게 명했지만 아마쿠사 섬의 5명의 토호들이 이를 거부하자
고니시는 오사카의 히데요시에게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서찰을 보내고 마음대로 해라는 답신을 받는다. 결국 군사를 이끌고 아마쿠사 섬을 공격하지만 패하고 두번째에는 야간에 침입하여 섬을 크게돌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만다. 어쩔수없이 키요마사가 군대를 이끌고 밤에 침투한다. 그리고 총알을 막을 나무판을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바로 성을 공격하지않고 한지역을 점령후 그곳에 진을 친다.
승산이 없다고 본 아마쿠사 섬의 우두머리는 키요마사에게 1대1 대결을 신청한다. 이것을 받아들여 결국 키요마사가 승리하고 적장을 죽인다.
전쟁후 고니시는 오사카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러 간다. 그러나 의외로 히데요시는 고니시에게 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면서 1년후에 더큰활약을 하라고한다. 뭐냐고 물으니 조선출병에 앞장서라는것이였다. 그리고 결혼하라는것이였다. 고니시는 조선 정세에도 밣았으며 큐슈의 크리스챤 다이묘들을 이끌고 가서 조선땅에서 눈에가시인 크리스챤 다이묘들을 없애려한 이유가 있었다. 고니시는 바로 큐슈로 안가고 사카이로가서 가족들과 상의후 아케치미츠히데의 딸을 모시던 시녀를 맘에 두고있어서 우토로 떠나기전날 다시 오사카로가서 히데요시에게 그 시녀와 결혼을 원한다고 보고한다. 알았다고는 했지만 히데요시는 자기 뒤통수를 칠 수작이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니시가 우토로 돌아가고 교대로 카토가 오사카에 간다. 그리고 승전을 보고하고 히데요시도 반긴다. 그러면서 또 히데요시는 카토에게도 결혼하라고 한다. 어떤여자가 좋냐고 하니 이쁘지않고 평범하고 간섭하지않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쿠마모토로 돌아가자마자 평범한 호족가문의 딸과 결혼한다.
고니시는 히데요시가 자기를 조선정벌에 선두로 세울것을 미리 짐작하고 이 전쟁을 빨리 끝낼것만 생각한다.
대마도는 산이많고 평야가 없어 백성은 가난하고 주생산은 고기잡이였다. 그래서 15세기초부터 조선으로 건너가 쌀과 콩 등의 곡물원조를 요청했다. 그로인해 조선에서는 대마도를 자국령으로 여겼고 대마도에서도 일본의 일부이면서 조선을 벗어나서 살아갈수 없었다.
고니시는 대마도의 영주인 소씨에게 사람을 보내지만 소씨가 아직 소년이라 그의 가신이 고니시에게 찾아온다. 히데요시는 조선국왕의 투항을 전쟁에 반대하는 소씨에게 강요했기때문이다. 가신이 찾아온 이날부터 고니시와 소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며 나중에 고니시의 딸을 소씨에게 시집도 보내게된다.
1589년 히데요시는 소씨에게 조선국왕의 투항을 다시 재촉하라고 명을 내린다. 소씨는 이문제로 고니시와 의논하여 연극을 벌이게된다.
조선왕의 투항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일본통일을 축하하기위해 사절단을 파견해달라는것.
11월 황윤길 외 2명은 히데요시를 만났고 그자리에 고니시의 지시를 받은 통역관이 말을 고쳐 통역을 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조선의 왕에게 보낼 답서를 적었는데 "가까운 시일내에 명나라를 칠것이니 조선이 압장서라"는 내용이였다. 고니시와 소씨는 답서를 사절단에게 이대로 줄수없어 중간에 수정을 한다. 그리고 사절단이 돌아간후 히데요시는 조선으로부터 "명나라치는것에 앞장설것인지" 에 대한 답서를 기다렸지만 측근에서는 애매한 대답밖에 하지않는다. 이때 고니시와소씨는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길 바랬다. 도쿠가와가 반란을 일으킨다든지~~등등 그러나 예상치못하게 히데요시의 3살 아들 쯔루마쯔가 죽자 명나라를 치는것에 더 확고해지며 이때부터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어쩔수없었지만 사람들은 조선정벌에 반대하였다. 남편을 잃을수있고 군량미를 지원해야했기때문
전국 동원령이 발령나고 큐슈의 히젠 나고야성에는 히데요시의 작전본부가 설치되었다 원래는 하카타에 작전본부를 설치하려했으나 바다수심이 얕아 히젠의 나고야성으로 했다고 함. 전국의 군량미가 나고야성으로 옮겨졌다.
1591년이 저물어갈무렵 조선에서는 아무 답변이 없어 히데요시는 고니시를 불러 따진다. 히데요시는 내년 정월(설날)까지 답변이 없으면 조선을 치기로 한다. 이시다 미쯔나리도 일본통일을 한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에 반대하여 뒤에서 고니시를 도와주기도 했으나 히데요시에게 반론을 재기할수없었다.
1592년 정월이 지나자 히데요시는 고니시를 1군, 카토 키요마사를 2군 지휘자로 정했다. 고니시는 크리스챤 영주들과함께 4월12일 아침 대마도에서 배들을 출발시켜 오후에 부산쪽에 도착. 이때까지도 조선은 전쟁이 일어날지 알지못했다.고니시는 부산에 도착해서도 바로 공격하지말라고 명을 내리고 하루동안 지체한것은 조선측에 사람을 보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부산주민들은 성외부에 구덩이를 파고 쇠사슬을 둘러쳤다. 그리고 대기하고있는 일본군을 지켜보고있었다. 성벽아래로 조선말을 하는 일본군사가 와서 "우리는 싸우러온것이아니다 명나라를 가기위해 길을 빌려달라"라고 하지만 조선측은 들은척도안한다. 부산성에는 600명정도 있었는데 야습에 대비해 여자들은 밥을짓고 남자들은 활을 만들었다. 새벽3시가 되자 전쟁이 시작됬다. 조선에는 없는 철포 총이 발사되어 움츠려했으며 일본군은 화살을 막기위해 나무판자로 방어하고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본군에 화살을 쏘자 일본진영에서는 총탄을 퍼부었다. 아침이되자 조선장군 정발은 죽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고니시는 내일있을 동래성 전투를 위해 군사들을 쉬게했다.
조선포로에 의하면 동래성에는 2만명이 주둔하고있다고한다. 쉽게 승리한 고니시는 철포의 화력에 놀라 조선이 먼저 화의를 청해와서 전쟁이 끝나길 바랬다. 일본군이 동래성에 접근하자 성곽과 산속에 잠복해있던 조선군이 수많은 활을 쏴서 고니시는 패하고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
고니시는 2~3일 후 조선으로 올 카토키요마사가 자신을 비웃을까봐 뱃사공과 인부들까지 전투에 투입시킨다.
밤이라 캄캄해 활을 쏴도 목표물이 분간이 안되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성주인 송상현은 성문 누상의 앉아있었다. 일본군이 자기를 잡으러 오자 발로 차서 결국 죽는다. 이후 고니시는 2주일간 동래, 양산, 밀양, 대구를 함락하고 상주성을 포위했다
1천명이 있던 상주성은 1만7천명의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카토키요마사가 부산->양산->경주 동쪽라인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중에 충주에서 고니시와 카토는 합류하기로 했지만 고니시는 합류하기 싫어했다. 고니시는 성을 하나씩 함락할때마다 똑똑해보이는 포로들을 골라 "조선과는 싸우고싶지않다. 명나라를치기위해 길을 빌려달라" 라는 가도입명 의 서찰을 보내게했다.그러나 간 포로들은 북쪽으로 도망가 돌아오지않았다. 고니시는 올때 대마도의 소씨도 같이 동행했다.
상주성을 함락하고 서둘러 고니시는 충주성으로 이동했다. 카토가 오기전에 충주성을 함락해야 계획대로 되었기때문이다. 카토가 먼저 한양에 도착하면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조선이 불바다가 되기때문이다. 카토는 경주성에서 1만5천명의 수급을 베고 고니시가 13일 상주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비택"이라는 마을에서 군사들을 쉬게한다. 그리고 충주성이 무너지면 한양도 무너지기에 조선측의 항전도 심할거라 생각해 카토는 고니시와 충주성에서 합류하기보다 고니시의 병력을 약화시키고 공을 차지하기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조선 명장이였던 신립이 8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를 지키고있었다. 처음 조선측의 작전은 조령(새재)이 길이 험해 고니사가 올때 공격하자는것이였으나 신립이 조선군의 주력인 기마부대가 마음껏 싸울수있는 탄금대로 정한다.
조선군은 총력을 다해 싸울생각이었기에 충주성은 텅텅비어있었으며 병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성에서 빠져나왔다. 고니시는 예비부대 병력만 충주성에 남겨놓고 조선의 기마부대를 어떻게 무찌를까 생각하다 전에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쯔요리와 싸울때의 2열 조총 방법을 썼다.
신립은 일본군이 조총을 갖고있는것을 알고 적이 최대한 가까이 왔을때 기마부대를 공격하려하였으나 그 계획을 안 조선의 순병사 이일이 신립을 배신하고 독단적으로 기마부대를 출병시켰고 일본군은 후퇴하면서 조총부대가 2열로 쏘기시작하고 결국 조선측은 3천명이 죽고 신립도 이마에 총맞아 죽는다. 하루뒤에 충주성에 도착한 카토는 고니시를 얕잡아본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충주성에서 고니시와 카토는 합류하게된다. 그리고 충주성안에 진을 치지않고 성밖에 진을친다. 밤이되자 키요마사 진영에 화톳불이 피어올랐다. 고니시의 명으로 염탐을 다녀온 부하는 아무소리가 안난다. 여기서 자고 출발할것같다라고 보고하자 아무소리가 나지않는것이 이상히 여겨 자고있는지 다시 보고 오라고 한다.
키요마사부대는 고니시보다 먼저 한양을 점령하기위해 먼저 떠났다. 고니시는 키요마사보다 한양에 도착해 왕의 측근과 교섭하여 전쟁을 피하고 목적이 싸우는것이 아니라 화의라는것을 알려야했다. 그러나 용인을 거쳐 5월2일 키요마사 부대가 한강을 건너고 노을질무렵 경복궁에 도착했지만 조용해서 경계를 늦추지않았지만 성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니시도 뒤늦게 경복궁에 도착했지만 불탄 냄새가 나고 키요마사와 경복궁에서 만난다. 국왕의 보물과 서적들이 불타있었으며 히데요시에게 가져갈 전리품을 챙기지 못해 키요마사는 낙담했다. 이것으로 보아 경복궁,창덕궁 등은 일본군이 불태운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들이 불태운것이다.
충주 함락의 비보가 그날 저녁에 한양으로 전해지자 한양 조정에서는 평양으로 갈것인지? 한양을 지킬것인지? 두파로 나눠졌다.
한양를 지켜야할 군사들이 도망가자 선조는 둘째아들 광해군을 홛태자로 삼고 첫째아들과 여섯째아들을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 황실 경비병 모집을 하게했다. 그리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간다.
5월6일과7일 1군,2군에 이어 속속히3군,4군,8군이 한양에 입성한다. 한양 교외에서 일본 지휘장수들은 술을마시며 의논한결과 고니시는 다시한번 조선측과 화의 교섭을 하기로하고 그사이 각군은 한양에 남아 말과 군량미를 조달하기로 한다. 그후 각자 맡은 지역으로 북상하기로 의논한다..
이 회의에 키요마사는 불만이 많았다. 한편 유키나가는 조선측과 교섭을 시도했다. 염탐꾼의 정보에 의하면 한양에서 10리떨어진 임진강 부근에 조선의 선봉 병사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유키나가는 대마도의 소 요시토모의 가로인 시게노부에게 부탁하였고 시게노부는 대마도의 승려와 같이 조선측에 들어가 조선측 장수 김명원을 만나 화의를 청하였고 사흘후에 답을 주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고니시도 몹시 기뻐하였지만 예전부터 고니시의 행동을 의심한 키요마사가 스파이를 붙여 시게노부와 스님이 조선측에 들어간 내용을 듣게되고 키요마사는 부대를 두개로 나눠 한부대는 경복궁을 불태웠고 다른부대는 김명원이 있는 진영에 야습을 가했다. 이로인해 조선과의 교섭도 끝나게 되고 키요마사를 증오하게된다.
숙적2
조선출병을 명받지 않은 다이묘들은 히젠나고야성에서 히데요시의 눈치를 보며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양을 손에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에게 각자의 영지로 내려가라고 하면서 자신이 조선에 직접 갈거니 그때까지 출전준비를 게을리하지말라고 한다.
도쿠가와는 히데요시가 건강이 악화된것을 알고 약초를 직접 차로 우려먹었으며 영지와 군사력을 키우면서 때를 기다렸다.
한양이 함락된지 보름후 이순신장군 수군에 의해 바다의 재해권을 잃었다는것과 히데요시 어머니 오만도코로가 병이 들었다고해서 바로 큐슈의나고야성에서 오사카로 이동했다.
6월15일
고니시는 제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와 함께 평양에 들어왔지만 텅비어있고 도망가지못한 조선백성들이 선조와 광해군은 이미 북쪽으로 도망갔다고 전했다. 조선조정은 유키나가와 교섭할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더이상 북진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유키나가는 평양 교외에 성채를 쌓고 군량미를 모으라고 지시한다. 이것은 히데요시에게 노골적으로 반항하는것이였다. 그때 히데요시 대신에 이시다미쯔나리가 한양에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있었다. 전쟁상황을 지켜본 이시다미쯔나리는 히데요시에게 일본군이 점령한것은 점뿐이며 점과점을 연결하는 선에는 조선의병이 출몰해 조선 한나라만 치기에도 벅차며 내년 봄까지 중국진격을 중지할것을 보고서로 보낸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7월에 키요마사는 계속 북진하여 함경도의 두만강 국경까지 인접한 회령까지 점령했다.그리고 첫째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다. 선조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인 명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왔다. 이것은 마치 1950년 북한 vs 미국 싸울때 중공군이 도운것과 비슷하다.
7월16일 명나라는 조선4천기병부대를 앞세워 의주에서 평양으로 진격해갔다. 조명연합은 고니시가 있는 평양을 공격하였고 예상하지못한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조선의 기병들이 좁은 길에 못들어와 서로공격했지만 다음날 유키나가의 동생시신이 발견된다.
8월, 이시다 미쯔나리를 중심으로 각군의 장수들이 한양에 모여 회의가 열렸다.고니시는 이 회의를 위해 잠시 평양성에서 한양으로 왔고 키요마사는 멀리있어서 갈수없다는 핑계를 대고 불참한다.
그날밤 막사로 돌아온 고니시에게 이시다미쯔나리가 방문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건강악화로 인해 잘못되었을경우 도쿠가와가 군사를 일으킬것이 분명하였기에 이에대비하여 연합을 하자는 이야기였다. 고니시는 이에 찬성했고 대신 명나라에 화친교섭은 고니시가 하겠다고 하고 명나라와 교섭이 잘되었을경우 명나라무역은 고니시집안이 하는조건이였다. 그리고 이때 이시다미쯔나리는 고니시집안은 명나라,조선과 여러약재를 쓰지 않는가~ 라는 이야기를 한다. 고니시는 이 의미를 간파했다.
여름이 되어 평양에 있던 고니시와 여러 장수들은 이순신장군이 몇개의 배로 73척의 일본수군을 한산도바다로 유인해 섬주변에 숨어있던 조선수군이 나타나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하여 53척의 배를 부수웠다는 패전을 듣게된다. 겨울에 대비하여 식량과 탄약, 무기조달이 안되게되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수밖에 없게된다.
8월말경, 한명의 서툰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고니시에게 찾아왔다. 왜군이 진심으로 화의를 바란다면 자기 주인인 명나라장수 심유경이 중개역활을 하고자한다. 라고 말한다. 심유경과의 회견날짜는 8월30일 평양 교외였다. 늙은 심유경과 만난 고니시는 대동강 북쪽은 명나라가 남쪽으로는 일본이 차지하는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심유경은 이것은 자기혼자 판단할사항이 아니라 50일간의 시간을 달라고한다. 그리고 고니시는 50일간 전쟁을 멈추고 식량을 구하러 평양 바깥으로 나가는것도 금지했다. 50일이 지나도 심유경은 나타나지않고 대신 처음에 왔던 조선인이 왔다. 심유경이 나이간 든 탓에 늦어진다고하여 그를 인질로 잡고 11월말경 심유경이 다시 찾아왔다.
그사이에 조명연합은 4만3천의 병력을 이끌고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건너왔고 그때까지도 고니시는 자기가 속은것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후 심유경이 보낸 심부름꾼인 조선인이 심유경이 신안으로 고니시를 오라고 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러나 고니시의 부하중에 한명이 가면 위험할거라 하며 자기가 순안으로 가지만 거기서 잡히고만다. 부하는 돌아오지않고 식량도 바닥난상태. 설날이 지나 조명연합이 평양에 당도했다. 그것을 본 고니시는 일본군에 평양성안으로 철수하라고 명을 내린다. 고니시 1만5천 vs 4만3천 이였고 조명연합은 불화살을 쏘고 명나라의 강철로만든 갑옷은 활과창이 아무소용없었다. 어쩔수없이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후퇴하여 오토모 장수가있는 봉산성으로 철수한다. 그러나 봉산성의 오토모부대는 도망간후였고 고니시는 다시 용산성과 백천성을 수비하고있는 구로다 나가무사에게 간다. 1만5천-> 8천으로 줄었다.
히데요시는 가족을 소중히여겼지만 여자를 밣혀 섹스를 많이해 몸이 급 쇠약해졌다는 설이있다. 히데요시는 천하의 미녀들을 오사카성으로 불러모으고 여러측실들을 거느렸다. 또 예쁜시녀에게까지 손을댔다. 도쿠가와도 히데요시만큼은 아니였지만 신분이 낮은 여자에게만 손대는짓을 했다고한다. 이유는 미녀에게는 마음까지 움직여 섹스를 지나치게 해서 몸이 나빠지기때문이다.
한양에서 이시다미쯔나리를 중심으로 고니시, 카토키요마사가 모여 한양을 버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어선을 피자라고 하는의견과 키요마사는 명나라에 맞서자고 주장한다. 결국 부산으로 철수하기로 한다.
3월이 되자 고니시에게 심유경이 찾아왔다. 또 속일려면 돌아가라고 하지만 심유경은 그때그일은 자기뜻이 아니였다고 하면서 평양성의 명나라는 이미 철수했다고하며 일본군에게 한양에서 철수하라고한다.
이시다,고니시,카토는 한양에서 철수하는것으로 하고 히데요시를 설득하여 허가를 받았다.
1593년 4월18일 일본군이 한양에서 떠났다.
텅빈 한양에는 굶어죽은 남녀의 시신이 뒹글러져있었고 일본군은 부산,울산,서생포,김해,웅천 등 한반도 남부지역에 방어선을 치고 봄이오길기다린다.
한양에서 철수하여 2주일뒤 고니시는 웅천에 성채를 쌓고있는데 이시다미쯔나리가 파견한 무사가 급히 부산으로 오라는 말을 전한다.
부산으로 간 고니시는 히데요시가 보내온 강화조약문서를 보고 한탄한다.
1.명나라공주를 일본의 황비로 삼을것
2.명나라와의 무역을 재개할것
3.조선8도중 4도는 일본에 넘기고 한양과 나머지 4도는 조선에 반환할것
4.조선왕자 1명, 대신1명을 일본으로 보낼것
등등.
히데요시는 이 조약과 더불어 키요마사에게는 진주를 공격하라는 명을 내린다. 고니시는 이시다미쯔나리에게 전에 미쯔나리가 말한 히데요시 독약으로 죽이는 계획을 가족과 상의하기위해 1년4개월만에 부산포에서 출발해 나흘간 걸쳐 큐슈에 간다.
나고야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났는데 히데요시는 6월에 자기가 직접 조선에 간다고 하자 고니시는 조만간 명나라에서 사죄 사절을 보낼거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시다와 고니시가 가짜로 만든 계획이다. 그리고 심유경에게 화의 한다는 명분으로 사절을 일본에 보내줄것을 부탁한다.
히데요시를 만난다음 가족을 만나 히데요시를 죽여야 이전쟁이 끝난다고 얘기하며 독약을 구해와달라고한다.
이사실을 부인 이토에게도 알리고 부인은 자신이 히데요시에게 접근하겠다고 한다. 고니시는 다시 부산포로 온후 대담해져 심유경에게 카토키요마사가 조만간 진주성을 칠것이라고 편지를 보낸다.선조실록에도 고니시는 진주의 백성들을 즉시 피난시키도록 권했지만 조선측은 고니시의 통보를 믿지않아 성안의 주민들을 피난시키지않았다. 그리고 진주성 전투가 일어난다. 이 전투이후 고시니는 더욱 대담해져 심유경을 웅천으로 불러들여 히데요시가 쓴 강화조약문서를 수정하여 명황제에게 아부하는 내용으로 바꿔 키리스챤 장수에게 베이징으로 가지고 가서 황제에게 건낼것을 명한다. 세례명은 조안이다.
1594년 12월 조안이 북경에 도착하여 명황제를 만난다. 고니시와 심유경이 조작한 강화와 책봉청원서를 허가하고 명나라조정은 고니시에게 이사실을 알리기위해 사절을 파병했다. 그렇지만 조안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니 세가지 서약을 요구했다.
1.조선에 두번다시 침략하지말것
2.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도 통상을 요구하지말것
3.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할것
두 조건은 어째든 일본군 철수는 불가능했다. 비밀교섭을 눈치채지못한 카토키요마사가 의심을 품을수있기때문이다.
편지를 갖고온 사절에게 언제쯤 일본에 책봉 사절이 가게되는지 물어보니 내년초 약 한달뒤라고 한다. 책봉을 항복으로 조작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런데 키요마사에게도 키요마사의 큐슈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받고 조만간 히데요시가 명나라의 사절을 맞게되고 후계자를 얻어 매우 좋아한다는 내용이였다. 명나라 사절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듣게된 키요마사는 명나라 포로를 통해 이미 심유경과 고니시가 화의를 했고 철수까지 약속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갈려고 준비를 한다. 이소식을 안 고니시는 키요마사보다 일찍 히데요시를 만나야했다. 안그러면 고니시가문이 멸망하기때문이다. 다행히 고니시 1군은 바다 근처의 웅천에있었고 서둘러 오사카로 갔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뒤를 이을자는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히데쯔구였지만 요도기미가 아들을 낳자 요도기미는 히데쯔구를 미워하게됬고 히데쯔구는 조선에 출병하고싶어했으나 이시다미쯔나리는 그가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에 그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소문을 퍼트리게한다.
결국 히데요시는 히데쯔구에게 할복을 명하고 그의 처와 첩, 주변사람들이 극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히데요시에게 명나라는 일본에 항복할 생각이 뚜렸하며 조선에서 빨리 일본군을 철수해 주기를 바란다고 조만간 명나라에서 사절도 올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철수를 하더라도 반은 큐슈로 반은 조선에 남길거라고 하니까 히데요시도 생각해보겠다고한다.
그리고 키요마사가 걸핏하면 자신이 세운 무공을 자랑하고 명나라와의 교섭에 재를 뿌린다고 하자 옆에있던 이시다미쯔나리도 키요마사는 고니시는 상인출신이고 또 도요토미성을 쓸수있는 장수는 자기뿐이라고 했다고 히데요시에게 말하자 히데요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히데요시 성을 쓰는자가 자기뿐이라고 했단말이지~~하고 주의를 주겠다고 한다. 그러고 일어서더니 빈혈을 느끼며 비틀거려 쓰러졌다. 그리고 도산이라는 의원이 와서 맥을 짚더니 정상이 아니였다. 히데요시가 토한 이물질에서 격한 냄새나는것을 보고 시중에게 아침에 무얼먹었는지 물어본다. 평상시 먹는대로 먹었고 먹은것외에 히데요시의 첩이였던 마쯔노마루님(시바타가쯔이에 가신의 전부인)을 찾아가 남만인의 술을 한모금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산은 그 유리잔을 누가자기오왔냐고하자 마쯔노마루님의 시녀라고 하자 그 시녀를 불러 자백을 했지만 아무말이 없었다. 이사실을 히데요시의 가신인 무라이 우콘에게 도산이 전하자 우콘은 이사실을 이시다미쯔나리에게 알린다. 이시다는 자기가 알아서 자백을 받아내오겠다고 하며 고문을 받는곳으로 가서 각오는 되있겠지? 묻고 음식을 가져오게한후 그음식을 먹게하니 시녀가 죽었다. 그리고 이시다는 우콘에게 그시녀는 역시 히데쯔구가 시킨 수하였다고 거짓으로 말한다.
큐슈에서는 고니시의 형인 조세이가 독약을 구해 고니시의 부인 이토에게 건네준다. 이토는 고니시의 아버지에게 쿄토로 가게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측실이면서 시바타가쯔이에의 가신인 다케다겐메이의 아내였지만 시바타가문이 멸망하고 남편이 죽자 히데요시의 첩에게 히데요시 독살할것을 얘기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그녀도 이에응한다. 이토에게는 그시녀를 위해 공양을 해달라고 하고 고니시는 부인을 만날틈도없이 다시 조선으로 간다.
1596년 5월 히데요시는 키요마사를 일본으로 부르고 아무연락도 주질않았다. 그무렵 고니시는 7월1일 고니시는 명나라와조선의 사절 400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후시미에 도착했다.
7월13일 후시미성에 큰지진이 일어났다. 키요마사는 병사들과 후시미로 이동하여 히데요시를 보호하고 히데요시에게 인사를 한다.히데요시는 키요마사를 용서했다.
고니시는 이때 지진만 안일어났어도...라고 한탄한다. 고니시에 의심을 품은 키요마사는 부하를 시켜 고니시가 심유경과 짜고 일본을 명나라의 속국으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명나라 사절단을 파견했고 조선조정에서는 사절파견을 거부하여 결국 부산의 말단관리를 사절단으로 속여 조선사절단으로 꾸몄다는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바로 히데요시에게 말하지않고 도쿠가와와 논의했다. 그리고 도쿠가와는 고니시,이시다와도 적을 두면 안되었기에 히데요시에게는 사절단의 관직을 조사해보는것이 어떻냐고 제의하자 명나라는 아무이상없었지만 조선사절은 관직이 탈로가 났다. 히데요시는 결국 명나라 심유경, 양만형만 9월2일 오사카성에 초대했다. 히데요시도 그들을 반겼다. 3번째 히데요시와 만나던 밤에 오사카성에서 나왔다는 스님이 조선사절에게 요구사항을 적어달라고했다. 그러자 서툰글씨로 적어보냈는데 지금까지 고니시가 자신을 속인것을 안 히데요시가 그걸보고 고니시를 불러들이고 화를냈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았는데 그이유는 밝혀지지않았다. 한가지설은 이시다를 포함한 히데요시 측근참모들도 참여했기때문이라는 이유이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군사를 다시 출진시켰다. 제1군은 키요마사, 2군은 고니시 = 정유재란
고니시의 권한은 크게 박탈되었고 키요마사의 명을 받게되었다. 그리고 고니시는 조선의 김응서에게 화의가 이루어지지않았던것은 기요마사의 탓이다. 키요마사는 이날이날에 이섬에 머무를것이며 이때 공격하면 승리할수있을것이다라고 조선측에 알려주지만 조선조정은 이문제가지고 논의했지만 이순신장군이 적의 함정이랴며 반대했다. 그러나 실제로 키요마사는 그날에 그섬에 갔었고 조선측은 기회를 놓쳤다.
정유재란때는 조선측도 대비를 강화하여 일본은 북진을 할수없어 남쪽에 진을 쳤다. 키요마사는 울산에 성을 쌓는중이였고 울산성에서 좀 떨어진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명연합이 쳐들어와 긴급히 키요마사는 조선인옷을 입고 배를타고 울산성으로 향했다. 철포에 헤메던 조명연합은 일본약점인 군량미 길을 차단했고 식량이 떨어지자 소와 말을 잡아먹었다.벽에 바른 흙을 글어내어 빗물과 함께 먹기도했다. 그러나 두달이 지나도 지원병은 오지않았다.
쿄토의 후시미에서는 히데요시가 꽃놀이를 열었는데 그곳에 이토가 다실을 열었다. 히데요시는 여러다실을 둘러보다 예쁜미모의 이토에게 끌려 차를 마신다. 그리고 이토는 남만선박에서 시아버지 류사가 사온 향이라고 하며 독이들어있는 향이였다. 그이후로 히데요시는 일어서질 못했다.
울산성에는 4만의 조명연합과 전투중이였으며 드디어 일본측의 3만명의 지원군이 오자 조명연합은 철수했다. 이유는 일본군의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낳기때문이다.
울산에서 철수한 조명연합은 재편성하여 순천의 고니시와 사천의 시마즈 공격에 나섰다.
1598년 8월5일 히데요시는 5명의 다이묘들에게 편지를 적는다. 내용은 조선의 일본군 철수.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였다.
그리고 8월18일 숨을거두었다. 그러나 이소식을 이시다미쯔나리는 고니시와 카토에게 알리지않았다. 순천성은 유정에 의해 포위당해있었지만 일본의 총격이 두려워 공격은안하고 포위만 하고있었다. 고니시는 밤에 몰래 파견한 전령의 소식으로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았다.
고니시는 유정에게 명나라,조선과 화의를 맺어 철수하겠다고 하자 이상하게 여겨 알아보자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조명연합도 알게되었다. 그리고 유정은 전군에 순천과 사천에 맹공격을 가했다.10월1~12일까지 바다와육지에서 전쟁이 일어났지만 일본군들은 이전쟁에서 이기지못하면 일본에 돌아갈수없다고 여겨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유정도 어쩔수없이 12일에 유정은 일본측에 강화를 제안하고 고니시는 이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유정과는 반대로 일본군이 철수할때 공격하려는 계획을 짠다.
11월이 되자 고니시는 부하군사 절반을 철수시키는데 동의하고 그들이 철수하기전날 술판을 벌이고다음날 아침 바다에는 조명연한 수군이 배치되어있었다. 그리고 순천성을 넘기라는 요구가 적혀있는 편지를 보내왔다. 11월중순경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명연합의 공격으로 쩔쩔맸으나 이순신장군의 죽음으로 간신히 일본으로 도망갈수있었다. 일본군은 철군하기전에 성채를 남김없이 불태워버렸다.
11월26일 고니시는 부산에서 일본으로 철군함으로써 7년간의 전쟁은 끝이난다.
---------------------------------------------------------------------------------------------------------------------------
히데요시가 죽노난후 미쯔나리와 도쿠가와가 일본패권을 갖기위해 서로 다이묘들을 모은다. 이전쟁의 승패는 다이로였던 나이든 마에다 도시이에가 어느쪽편을 서는것이였다. 도쿠가와는 마에다 도시이에가 모리 테루모토,우기타 등의 다이로들, 미쯔나리, 아사노 나가마사등과 공모하여 이에야스를 암살한다는 비밀정보를 입수한다. 이사건은 사전에 탈로나 유폐당하지만 나중에 풀어준다. 또 도쿠가와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자기손녀와 혼인시키며 자기편으로 만든다.
미쯔나리는 우토에있던 고니시를 불러 사카이에서 만나 자기편에 서달라도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3월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고 유언을 남기는데 비록 도쿠가와에게 붙었지만 히데요리를 지켜주라는 내용이다. 미쯔나리는 키요마사가 자기를 죽이려한다는것을 알고 같은편 장수에게 도망갔고 키요마사를 뒤에서 조종하는 도쿠가와에게 도움을 청한다.
미쯔나리는 모리 테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세우고 동군쪽에 가담할지 모를 다이묘들의 처자식들을 오사카로 인질로 잡아온다.
세키가하라전투에 서군의 총대장인 모리 테루모토는 출전하지않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킨다는 핑계를대고 오사카성으로 들어가버린다.
카토 키요마사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지만 도요토미 내부의적인 이시다와 고니시를 제거하기위해 어쩔수없이 도쿠가와편에 섰다.
그리고 자기를 암살하려고했던 아사노 나가마사,히지카타, 오노 등도 유폐에서 풀어주어 이들도 도쿠가와 편으로 만든다. 도쿠가와는 이전쟁을 위해 미리 여러 다이묘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영지확장을 약속했다.
오전 6시경 도쿠가와부대가 세키가하라에 도착했다 서군 8만여명 VS 동군 7만5천명
그러나 서군에서 실제로 전쟁에 가담한 군사는 3만5천명뿐이였고 나머지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특히 오바야카와 히데요키는 지켜보고만 있었으며 미쯔나리와고니시가 공격에 가담할것을 촉구했다. 이것을 지켜본 이에야스가 철포를 쏘더니 동군에 붙으라고 재촉한다오바야카와는 동군에 붙고 오후1시직전이 되서도 이에야스는 우위를 확보하지못하자 사전에 동군에 붙으면 2개의 영지를 더 주겠다고 약속을 한 히데아키가 움직이지않자 또 철포를 히테아키 쪽에 쏜다. 히데아키도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에 붙었고 뒤이어 오타니 요시쯔구 지위아래있던 4개의 부대가 배신하여 오타니 요시쯔구 본대를 공격한다. 오타니는 승산이 없다고 여겨 할복하고 오후1시 오타니 부대가 무너지면서 서군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미쯔나리도 후퇴했고 고니시는 미쯔나리쪽 진영으로 도망갔다가 미쯔나리가 없어 후퇴하다 키리스챤이기에 자결할수없어 자수한다.
우토성은 고니시의 동생이 지키고있었고 키요마사군사에 둘러쌓여있었다. 그리고 깃발을 보니 서군에 서야할 크리스챤 다이묘들도 키요마사와 같이있는것을보고 배신하여 서군이 전쟁에서 진것을 알게됬다.
미쯔나리,고니시,에케이 는 쿄토의 사형장에서 같이 처형당했다. 고니시는 고해성사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도쿠가와가 무시했다.
우토성은 계속 항복하지않고 고니시가 올것이라고 계속항쟁한다. 키요마사는 서군에 섰던 우토 병사들이 반드시 우토로 올것이라고 여겨 밤에 잠복해있다가 배를타고 오는 세명의 우토병사들을 잡아 음식을 내오지만 이들은 먹지않고 키요마사가 말한 우토성의 고니시 하야토 한사람만 자결하면 모두 살려주겠다고.. 키요마사 편으로 붙고싶은사람은 걷어주겠다고 말을 전하라고 하며 우토성으로 들어간다.
다음날 우토성 천수각의 창문을 열고 키요마사진영에 할복할테니 병사들을 살려달라는 서찰의 화살을 쏜다. 그리고 그날 하루동안 하야토는 우토성을 청소하라명했고 5명의 선교사들이 미사를 올렸다. 그리고 성밖으로 나와 가마를 타고 구마모토로 가는 마타사에몬의 저택에서 자결한다. 이토는 아이들과 함께 우토의 항구에 닿을때까지 가마에 타고 선교사들과 배를 타고 시마바라 반도까지 갔다가 나가사키로 갔다.
키요마사는 우토성안으로 들어가 성루 하나를 쿠마모토로 옮겨서 우토성루라고 부르라고 명을내린다. 숙적이였던 고니시의 자취를 보존하게한것이다.
이토는 나가사키의 바다가 보이는 곶에서 생활했으며 이곳은 히데요시가 큐슈정벌때 26명의 키리스탄과 선교자를 처형한곳으로 유명하다. 이후 히데요시는 남만무역으로 이익을 챙기기위해 자신이 내렸던 금교령을 완화하고 이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얼마지나지않아 이 수도원에 대마도의 소 요시토모에게 시집갔던 딸이 이혼당해 찾아왔다. 도쿠가와의 분노에 두려워 가족과 가신들을 지키기위해서 이혼을 해야만했다. 이토와 딸은 수도원에서 떨어진 집에서 다른 여성들과 살았다.
그리고 키요마사는 고니시가 죽고 6년후인 1606년 히데요리가 있던 오사카에서 히고로 배를 타고 가던도중 갑자기 열이나더니 구토를 하고 구마모토에 도착했을때에는 중태였다. 한달뒤 고니시와 같은 50세에 숨을 거둔다. 사람들은 그가 독을 마셨다고 소곤거리며 그 하수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