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 시절의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지만 그 속에는 크나큰 야망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다이묘들 중에서 조총의 중요성을 가장 처음 알아차린 인물이고 일본에서 최초로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여 다른 다이묘들이 제대로 된 군사작전을 할 수 없었던 농번기에도 군사작전을 벌일 수가 있었습니다.
기회를 포착하는데 민감했고 항상 과감하게 행동했으며 전략, 전술에 있어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습니다.
또한 지극히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전례나 관례, 사회적인 통념 등을 무시하고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했고 공포에 가까울 정도의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2.
-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싸운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에서는 열이면 열 이마가와 군의 압승을 예상했으나 기습작전으로 요시모토의 목을 베고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사이 나가마사 군과 싸웠던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는 원군이었던 도쿠가와 군의 선전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 다케다 가쓰요리와 벌였던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는 말막이 목책과 조총을 이용하여 기마병으로 이름 높던 다케다 군을 거의 붕괴시키기에 이릅니다.
3.
노부나가가 발탁한 인재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쓰히데 등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사후 미쓰히데 군을 물리치고 오다 군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일본 통일을 이룬 인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노부나가 휘하에서는 노부나가의 신발 담당 하인으로 시작하여 군단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후일 혼노지에 머물던 노부나가를 공격하여 죽인 인물입니다.
원래는 아사쿠라 가문에 있다가 아시카가 쇼군을 섬겼으며 이후 노부나가 밑에서 일하면서 군단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4.
울지 않는 새는 죽인다 -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 -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 이에야스
[편집] 개요
본성은 자칭 후지하라 씨(藤原氏)지만, 실제는 인베 씨(忌部氏)일 수도 있다. 가계는 오와리 슈고 시바 가문(尾張守護・斯波氏)의 사관인 오다 가문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계는 오와리 슈고다이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계(織田大和守家)의 분가 가운데 기요스 산부교(清洲三奉行) 중 하나인 단쇼추 가문(弾正忠家)이다. 덧붙여 기요스 산부교 가문은 이나바노카미 오다 가문(因幡守家), 도자에몬 오다 가문(藤左衛門家), 단쇼추 오다 가문(弾正忠家)이 있다. 그리고 오와리 슈고다이 가문에는 기요스 오다 가문(清洲織田家)과 이와쿠라 오다 가문(岩倉織田家)이 있다. 가문의 입김은 이와쿠라 오다 가문이 제일 강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은 상기 서술대로 오와리 슈고다이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기요스 오다 가문)을 모시는 오다 단쇼추 가문이다.
후루와타리 성주 오다 노부히데의 차남 또는 삼남으로 태어났다. 이복형이 둘이라는 설이 있다. 노부나가는 적장자로 키워져 유아일때 나고야 성주로 부임하였다. 덴분 20년 (1551년) 급사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독을 상속받지만, 동생 오다 노부카쓰(노부유키)와 가독 다툼이 발생한다. 이에 동생 노부카쓰를 죽이고 가문내 혼란을 잠재운다. 이후, 적대세력을 차례차례 굴복시켜 오와리 국을 통일한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격파하였으며, 에이로쿠 10년(1567년) 미노의 사이토 가문을 제압하여 미노 국을 차지하였다. 그 다음해인 에이로쿠 11년(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봉하기 위해 상경전을 개시하여 오미 남부의 롯카구 가문과 교토의 미요시 가문을 제압했다. 그리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에 앉힌다. 하지만, 점차 쇼군과의 관계가 악화대었고, 겐키 4년(1573년) 마침내 쇼군을 추방하였다. 다케다 가문, 아사쿠라 가문, 엔랴쿠지, 이시야마 혼간지 등으로 이루어진 반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지만,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강 전투에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뒤이어 겐키 2년(1571년) 엔랴쿠지를 불태워 후한을 없앴다. 후한을 없앤 후 덴쇼 원년(1573년) 아사쿠라 가문과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켰다.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대승하였다. 이후 덴쇼 10년(1582년) 숙적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켜 천하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같은해 음력 6월 2일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에 의해 혼노지에서 자결하였다.
기존의 권위와 세력을 무력으로 배제하였고,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정책에 있어서도 낙시낙좌, 검지 등을 단행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 자신스스로 제육천마왕이라고 칭했다》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
[편집] 생애
[편집] 소년시절
덴분 3년(1534년) 음력 5월 12일 오와리 국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태어난 곳은 쇼바타 성 또는 나고야 성이라고 한다. 아명은 깃보시였다.
어머니 도타 고젠이 노부히데의 정실이였기 때문에 적장자로 키워져 2세때 나고야 성주로 부임하였다. 유소년기부터 기교한 행동을 많이 하여 주위로부터 오와리의 멍청이라고 불리었다. 일본에 전해진 조총에도 관심을 가진 삽화등도 알려져 있다. 또, 신분에 관계없이 농민들과도 어울렸다.
아직 세자였을 무렵 표면적으로 가신으로 입장을 지치고 있었지만, 잠재적으로는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던 주군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기요스 성 밑을 방화하는 등, 아버지 노부히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젊은 시절부터 대담한 행동을 보였다. 또, 이마가와측 인질로 호송중 가신의 배신으로 오다 가문으로 보내진 마쓰다이라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어린시절을 같이 보냈고, 후일 두 사람은 견고한 동맹관계를 맺게된다.
덴분 15년(1546년) 후루와타루 성에서 성인식을 하고 오다 가즈사노스케 노부나가로 칭했다. 덴분 17년(1548년) 노부나가의 교육을 담당했던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의 조력으로 아버지 노부히데와 적대관계에 있는 미노 국의 센고쿠 다이묘 사이토 도산과 화친을 성립시키고, 그 조건으로 도산의 딸 기초와 노부나가는 정략결혼을 하게된다. 덴분 18년(1549년) 이설로는 덴분 22년(1553년) 노부나가와 도산은 쇼토쿠지에서 회담을 했고, 이 때 도산은 멍청이라고 불리는 노부나가의 기량을 간파했다는 일화가 있다.
덴분 20년(1551년)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했지만, 장례에서 제단에 향을 던졌다고 한다.[2] 덴분 22년(1553년) 노부나가의 교육을 담담했던 히라테 마사히데가 자결한다. 노부나가는 이를 한탄해 세이슈지를 건립하여 그의 혼령을 위로한다.
[편집] 가독다툼에서 오와리 통일
당시, 오와리는 슈고 다이묘 시바 가문이 쇠하고, 오와리 4개군의 슈고다이인 오와리 야마토노카미 가문의 당주로 기요스 성주 오다 노부토모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그 노부토모를 모시는 산부교 가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뛰어난 지용으로 오와리 중서부의 지배권을 확대해 갔다. 노부히데 사후, 노부나가가 뒤를 잇지만, 주가 야마토노카미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토모는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카쓰를 지지해 노부나가를 모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노부토모에 의해 실권을 빼앗긴 오와리 슈고 시바 요시무네는 사전에 이 계획을 노부나가에 밀고 하였다. 이에 격노한 오다 노부토모는 요시무네의 적장자 시바 요시카네가 군사를 이끌고 물고기 사냥을 하러간 틈을 타 요시무네를 살해하였다.
이 때문에, 요시카네는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하였고, 노부나가는 주군 시바 요시무네를 죽인 반역자 오다 노부토모를 숙부 오다 노부미쓰와 함께 토벌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와리 4개군의 슈고다이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멸문되었다. 노부나가는 본거지를 나고야 성에서 기요스 성으로 옮겼다. 명실상부한 오다 가문의 필두가 되었다.
고지 2년(1556년) 음력 4월, 장인 사이토 도산이 아들 사이토 요시타쓰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 때 노부나가도 도산을 돕기 위해 원군을 보내지만, 때를 놓쳤다고 한다.
이러는 중, 오다 가문의 중신중 하야시 히데사다, 하야시 미치토모, 시바타 가쓰이에 등은 노부나가의 기량을 의심하여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쓰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에 노부나가를 지지하는 모리 요시나리, 사쿠마 모리시게, 사쿠마 노부모리 등과 대립하였다.
도산의 죽음을 호기로 노부카쓰파는 같은해 음력 8월 24일 거병하였지만, 이노우에서 노부나가에게 패하였다. (이노우 전투). 그 후, 노부나가는 노부카쓰가 농성중인 스에모리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어머니 도타 고젠의 중개로 그간의 일을 덮어 두었다. 고지 3년(1557년) 노부카쓰가 다시금 모반을 꾀하였고, 그것을 안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에게 밀고하였다. 노부나가는 병을 핑계로 동생 노부카쓰를 문병하게 하여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다.
게다가, 노부나가는 이누야마 성주 오다 노부키요와 협력해 옛 주가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기요스 오다 가문)의 숙적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오다 노부카타를 우키노에서 격파하였다. (우키노 전투) 그뒤, 노부카타를 추방하였다. 또, 새로이 오와리 슈고로 옹립된 시바 요시카네가 노부나가 토벌을 획책하자, 노부나가는 요시카네를 추방하였다.
에이로쿠 2년(1559년) 노부나가는 오와리 국내를 통일하였다.
[편집] 오케하자마 전투
오와리 국을 통일한 다음해인 에이로쿠 3년(1560년) 음력 5월 스루가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로 침공해 온다.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를 지배한 요시모토의 군세는 2만에서 4만에 이를 정도로 대군이였다. 이에 대해 오다 군은 총병력 5천에 불과했다. 이마가와 군은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군을 선봉으로 해 오다 가문의 성채를 차례차례 점령해 갔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침착했고, 깊은 밤에 노와 가부키의 원형인 고와카마이의 《아쓰모리》를 춘후, 갑옷을 입고 아쓰타 신궁에서 참배했다. 그 후, 젠쇼지 성채에서 약 4천의 군을 정비한 후, 적의 본군을 강습해 적장 요시모토의 목을 배었다. 음력 5월 19일에 일어난 이 전투를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한다. 총대장의 죽음을 안 이마가와 군은 본국인 스루가로 철퇴하였다.
오케하자마 전투 후,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은 쇠퇴하였고, 미카와 국의 다이묘 출신인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그 후, 모토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개명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미노를 공략하기 위해 사이토 가문과 교전하였고, 이에야스도 가이의 다케다 신겐과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자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런 까닭에 에이로쿠 5년(1562년) 양자간의 기요스 동맹이 맺어졌다.
[편집] 미노 공략
사이토 도산이 죽은 후, 미노 사이토 가문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오케하자마 전투를 전후해 양자간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에이로쿠 4년(1561년) 사이토 요시타쓰가 급사해 적장자 사이토 다쓰오키가 뒤를 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이토 가문 가신단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후, 노부나가는 사이토 가문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한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오미 북부의 아자이 나가마사와 동맹을 맺어 사이토 가문의 견제를 강화하였다. 이 때, 노부나가는 동생 이치를 아자이 가문으로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미노의 여러 성을 손에 넣었고, 더욱이 미노 3인방 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사이토 다쓰오키를 이세 나가시마로 패주시키고, 미노 국을 손에 넣었다. 이 때 노부나가의 나이는 33세였다. 이 시기 이노쿠치(井ノ口)란 지명을 기후(岐阜)로 개명하였다. 또,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직인으로 사용하였고, 표면적으로 천하통일의 야망을 드러냈다.
한편, 에이로쿠 8년(1565년) 노부나가는 이세로 눈을 돌려 기타바타케 도모노리 등 이세의 여러 호족과 전투를 벌인다. 이때 활약한 이가 다키가와 가즈마스였고, 그는 뒷날 노부나가의 중신중 한명이 되었다.
[편집] 상경전
이 무렵, 중앙에서는 에이로쿠 8년(1565년) 교토를 중심으로 기나이에서 권세를 자랑하는 미요시 가문의 유력자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마사야스, 이와나리 도모미치의 미요시 3인방과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반목하였고, 요시테루는 암살되었다. (에이로쿠의 변). 이후, 미요시 3인방과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제14대 쇼군으로 요시테루의 사촌동생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옹립해 막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암살도 꾸몄지만, 요시아키는 막신 호소카와 후지타카, 와다 고레마사의 도움으로 교토를 탈출해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몸을 의탁한다. 그러나, 요시카게는 미요시 가문 토벌에는 호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로쿠 11년(1568년) 음력 7월 미노의 오다 노부나가에 접근하였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미요시 가문 토벌 요청을 허락하는 한편, 미노 국과 국경을 접해있는 가이의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 신겐에게는 자신의 양녀를 신겐의 4남 다케다 가쓰요리와 결혼시켜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양녀 도야마후진은 다케다 노부카쓰를 낳은 직후 조세했기 때문에, 자신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와 신겐의 6녀 마쓰히메와의 혼약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등, 주위의 세력과 동맹을 맺어 국내외로 기반을 닦았다.
음력 9월, 노부나가는 쇼군을 옹립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상경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오미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 롯카쿠 요시카타, 요시하루 부자는 오다 군의 맹공을 받고 간논지 성이 낙성되어 이가 국로 도주하였다. (간논지 성 전투). 이후 요시카타, 요시하루 부자는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 때, 롯카쿠 가문의 종가 롯카쿠 요시히데, 요시사토는 노부나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전하자,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실력을 눈치채고 종속하였다. 그 외의 미요시 3인방은 아와로 도주하였다. 유일하게 저항하던 이케다 가쓰마사도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이렇게하여 중앙정치를 장악했던 미요시 정권은 겨우 6개월만에 무너졌다. 대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제15대 쇼군으로 옹립한 노부나가의 오다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 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로부터 부쇼군의 지위를 권유받지만, 사절하였다고 한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음력 1월, 노부나가가 이끄는 오다 군 주력이 미노로 돌아간 틈을 타, 미요시 3인방과 사이토 다쓰오키 등의 미노 낭인무리가 공모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있는 어소 로쿠조 혼코쿠지를 공격한다. (혼코쿠지의 변). 그러나, 노부나가는 호설이 내리는 중 겨우 2일만에 도착하는 신속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도착 전에 아자이 나가마사, 이케다 가쓰마사의 원군과 아케치 미쓰히데의 분전으로 미요시, 사이토 군은 패퇴하였다.
음력 1월 10일 미요시 군과 공동으로 궐기한 다카쓰키 성주 이리에 하루카게를 공격해 하루카게의 항복을 받았지만, 노부나가는 두 번의 이반은 허락하지 않고 처형하였다. 그리곤, 와다 고레마사를 다카쓰키 성에 입성시켜, 셋쓰 슈고 이케타 가쓰마사를 필두로 이타미 가문과 고레마사 삼인으로 셋쓰 국을 통치하게 했다. 같은 날 노부나가는 사카이의 복속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사카이 상인들은 미요시 3인방과 결탁해 노부나가에 대항하지만, 미요시 3인방이 노부나가에 패하자 복속하였다.
이세도 어느정도 진전되어 에이로쿠 11년(1568년) 간베 도모모리의 항복을 받고, 3남 오다 노부타카를 간베 가문의 양자로 보냈다. 다음해인 에이로쿠 12년(1569년) 이세 고쿠시인 기타바타케 도모노리의 항복을 받고, 차남 오다 노부카쓰를 기타바타케 가문의 양자로 보냈다. 그후, 도모노리는 유폐되었고, 기타바타케 일족은 살해되었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는 기나이에서 세력을 확대해갔다.
[편집] 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
에이로쿠 12년(1569년)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쇼군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덴추온오키테 9개조의 규정서, 후에 7개조를 추가해 반포하고, 이것을 쇼군 요시아키가 인정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대립이 표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겐키 원년(1570년) 음력 4월, 노부나가는 거듭된 상경명령을 무시하는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토벌하기 위해 아자이 가문과의 맹약을 반고하고, 동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에치젠 원정길에 오른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아사쿠라 가문의 여러 성을 차례차례 함락해 가지만, 가네가사키로 진군중, 오미 북부의 동맹자 아자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반해 노부나가를 궁지에 몰았다. 하지만, 후위를 맡은 이케다 가쓰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기노시타 히데요시,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분전으로 무사히 교토로 돌아갈 수 있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귀환할 때 따르는 자는 겨울 10명이였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대립은 더욱 격해졌고, 요시아키는 타도 노부나가가 적힌 어내서를 여러 영주에게 보냈다. 이에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 다케다 신겐, 모리 데루모토, 미요시 3인방에 더하여 엔랴쿠지, 이시야마 혼간지 등 사원세력도 호응해 노부나가 포위망을 결성하였다.
겐키 원년(1570년) 음력 6월 오미 국 아네가와 강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격돌한다. (아네가와 강 전투). 이 전투에서 아자이측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의 분전으로 고전하지만, 도쿠가와측의 도움으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겐키 원년(1570년) 음력 8월 노부나가는 셋쓰에서 거병한 미요시 3인방을 토벌하려 출진하지만, 이시야마 혼간지의 원군등도 있어 고전한다. 게다가 노부나가 본대가 셋쓰에 머물고 있는 동안, 아자이, 아사쿠라, 엔랴쿠지 등의 연합군 3만이 오미 사카모토로 처들어 온다. 오다 군도 대항했지만, 중신 모리 요시나리와 동생 오다 노부하루가 전사했다. 음력 9월 23일 급히 본대를 셋쓰에서 오미로 귀환했다. 황급히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은 히에이 산으로 자리를 옮겨 대항하였다. 이렇게 되자 노부나가는 오미 국 시가에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시가의 진). 그러나, 그 간 혼간지의 수장 겐뇨의 명을 받은 이세 나가시마 일향종이 반기를 들고, 오다 령의 오와리, 이세를 공격하였고,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오키와 중신 사카이 마사히사는 전사하였다. 궁지에 빠진 노부나가는 조정에 압력을 넣어 칙명 받아 음력 12월 13일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의 화친하였다. 이 때, 오쿠보 다다타카가 저술한 《미카와 이야기》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천하는 아사쿠라님이 가지시고, 저는 두 번 다시 천하를 바라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겐키 2년(1571년) 음력 9월 노부나가는 몇 번이고 퇴피, 중립을 권고한 후, 저항을 계속한 엔랴쿠지를 불태웠다. 이것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에 협력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한다.
겐키 3년(1572년) 음력 7월 노부나가는 적장자 기묘마루(후일 오다 노부타다)를 첫 출진시킨다. 이 무렵, 오다 군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소소한 전투를 반복하지만, 전황은 노부나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음력 8월 아사쿠라 군의 무장 마에바 요시쓰구, 도미타 나가시게 등이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음력 10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출병요청에 호응해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 움직였다. 다케다 군 총병력은 3만이 미노 동부를 비롯하여 도쿠가와 령의 도토미, 미카와로 쳐들어왔다.
미노 동부에서는 다케다 군의 무장 아키야마 노부토모가 이와무라 성을 공격했다. 노부나가의 숙모인 이와무라 성주 쓰야노카타는 적장 노부토모의 결혼전술에 말려 노부토모와 결혼해 항복하고, 양자로 있던 노부나가의 5남 보마루(후일 오다 가쓰나가)는 인질로 가이로 보내졌다. 미노 동부 대부분이 다케다 가문의 손에 떨어졌다.
또, 도쿠가와 령에 있어서도 도쿠가와 군은 히도코토자카 전투에서 패하였으며, 더욱이 음력 12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대패하였고, 원군으로 가있던 가신 히라테 히로히데는 전사하였다. 이 전투가 있기 전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히라테 히로히데로 구성된 3천의 원군을 보냈었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겐키 4년(1573년) 다케다 군은 미카와로 쳐들어갔고, 음력 2월 노다 성을 공략한다. 게다가 신겐의 상경전에 호응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협력해 거병한다. 동서로 적에 둘러싸인 노부나가는 궁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음력 4월 5일 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칙령을 받아 요시아키와 화친하였다. 음력 4월 12일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여 다케다 군은 가이로 귀환하였다.
[편집] 포위망의 붕괴
신겐 사후, 노부나가는 전력을 가다듬어 음력 7월 반기를 든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니조 성과 마키시마 성을 공격하여 요시아키를 교토로부터 추방하였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음력 7월 28일 연호를 겐키에서 덴쇼로 할 것을 조정에 아뢰었다.
덴쇼 원년(1573년) 음력 8월 노부나가는 호소카와 후지타카에 명하여 요도 성에 농성하고 있는 미요시 3인방중 한사람인 이와나리 도모미치를 토벌했다. 같은 달에 노부나가는 3만의 군을 이끌고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에치젠 원정길에 올랐다. 도네자카 전투에서 아사쿠라 군을 격파해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있는 이치노다니 성으로 진격한다. 이에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주변의 배신과 믿었던 사촌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의 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뒤이어 음력 9월 오다니 성을 공략하여 함락한다. 아자이 히사마사, 나가마사 부자는 자결하였고, 나가마사의 어머니 오노도노는 사로잡아 그녀의 열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잘라낸 후 살해하였다. 나가마사에 시집가 있던 동생 오이치노카타는 성이 함락되기 전 노부나가에게 인도되었다.
음력 9월 24일 노부나가는 오와리, 미노, 이세의 군을 중심으로 3만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나가시마로 진군하였다. 오다 군은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활약으로 보름정도 동안 나가시마 주변의 적성을 차례차례 함락하였지만, 저항도 격렬하여 음력 10월 25일 장기전을 우려한 노부나가는 철퇴하였다. 철퇴중 적군에 추격도 있어 오다 군은 고전하였고, 부장 하야시 미치마사는 전사하였다.
음력 11월 가와치의 미요시 요시쓰구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조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를 총대장으로 군을 가와치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의 실력을 두려워한 요시쓰구의 가신들은 배신하였고, 요시쓰구는 음력 11월 16일 자결하였다. 음력 12월 26일 야마토의 마쓰나가 히사히데도 다몬 산성을 양도하는 것으로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편집] 나가시마 일향종
덴쇼 2년(1574년) 음력 1월 오다 령이 되었던 에치젠에서 지역의 무사들과 혼간지 문도의 반란이 일어나 슈고다이인 마에바 요시쓰구를 죽이고 에치젠을 장악한다. 더욱이 이에 호응한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 동부에서 공격해왔다. 노부나가는 아들 노부타다와 함께 출진하여 맞서보지만,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노 동부의 아케치 성을 비롯 주변의 지성 18성을 함락하였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군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기후로 철퇴하였다.
음력 3월 노부나가는 상경하여 종3위 참의에 서임되었다.
음력 7월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나가시마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해 병량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나가시마 일향종 문도의 공격도 집요해 이복형 오다 노부히로를 비롯 다수의 무장이 전사하였다. 하지만, 음력 8월 병량이 고갈되었고, 오다 군의 맹공으로 오토리이 성이 함락되어 일향종 문도 천여명이 죽었다. 점차 전황은 오다 측에 유리하게 가져갔다.
음력 9월 29일 병량 부족을 느낀 나가시마 성의 문도는 항복하고, 배로 오사카 방면으로 퇴거 하겠다는 뜻을 노부나가에게 보여 이를 승낙하였다. 그러나 형제를 잃은 노부나가는 문도들의 퇴거도 늦고 해, 문도들의 배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문도 측은 격분하였고, 일부는 오다 군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히데나리를 죽인다.
더욱이 노부나가는 나가에 성, 야나가시마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나가시마 문도에 대해서는 성을 포위공격하여 문도 2만여명을 죽였다. 이 전투로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문도의 반란을 잠재우는데 성공하였다.
[편집] 나가시노 전투 및 에치젠 평정
덴쇼 3년(1575년) 음력 4월 다케다 가쓰요리는 신겐 사후, 다케다 가를 배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를 토벌하기 위해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사다마사의 거성 나가시노 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오쿠다이라 군도 선전하였기 때문에 다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 함락이 지체되었다. 음력 5월 12일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후를 출발해 음력 5월 17일 미카와의 노다에서 도쿠가와 군 8천과 합류하였다.
3만 8천으로 증가한 오다, 도쿠가와 군은 음력 5월 18일 시타라가하라에 진을 쳤다. 음력 5월 21일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 군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다케다 군에 완승하였다. (나가시노 전투). 《신장공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1천여정의 조총을 사용해 일제사격을 하였다. 소위 삼단격이라는 전법에 대한 학설은 의문시되는 것이 대세이다. 이후,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노부나가로부터 이름 한자를 받아 노부마사로 개명하였고, 이에야스의 장녀 가메히메를 처로 맞이하였다.
전년 에치젠을 장악한 혼간지 문도들이 슈고다이 마에바 요시쓰구 죽이는데 협력한 도미타 나가시게 등의 지역 무사들도 죄를 물어 처분하고 에치젠을 혼간지 문도들이 장악했었다. 그후, 덴쇼 3년(1575년) 음력 1월 혼간지 수장 겐뇨의 명으로 슈고다이로써 파견된 시모쓰마 라이쇼가 악정을 폈기 때문이었다. 이를 호기로 본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가 끝난 직후 음력 8월 에치젠으로 군사를 돌렸다.
혼간지 문도들도 저항하지만, 불만을 품은 일부 문도들이 노부나가에 협력하여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모쓰마 라이쇼,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를 비롯 1만 2천여명의 에치젠 국, 가가 국의 혼간지 문도가 토벌되었다.
이렇게 하여, 에치젠은 다시금 오다 가문의 영지로 되었고, 노부나가는 에치젠 8개군을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주었다. 이때 노부나가는 가쓰이에에게 북국[3]경영의 규정서를 주었다고 한다.
[편집]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

덴쇼 3년(1575년) 음력 11월 4일 노부나가는 권대납언으로, 동월 7일에는 우근위대장으로 서임되었다.
음력 11월 28일 노부나가는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에 오다 가문의 가독을 양도 하고 미노 국과 오와리 국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실권은 노부나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덴쇼 4년(1576년) 음력 1월 노부나가는 비와 호 호반에 아즈치 성의 축성을 지휘, 감독하였다. 덴쇼 7년(1579년) 5층7계의 천수가 완성되어 성의 공사가 완료되었다. 천수 내부에는 후키누키 양식[4]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어느 예수회의 선교사는 “이 같은 호화로운 성은 유럽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경탄한 편지를 모국에 보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기후 성을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에게 양도하고, 완성된 아즈치 성에 살았다. 노부나가는 이곳을 거점으로 천하통일에 매진하였다.
덴쇼 4년(1576년) 음력 1월, 노부나가에게 우의를 표했던 단바 국의 하타노 히데하루가 반기를 들었다. 더욱이 이시야마 혼간지도 재차 거병하는 등, 다시금 반노부나가의 움직임이 확산되어 갔다. 음력 4월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 아라키 무라시게, 반 나오마사을 총대장으로 3만 대군을 이시야마 혼간지의 거점인 오사카로 파견하였지만, 아시하라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부장 반 나오마사를 비롯 1천여명이상이 전사하였다.
오다 군은 수세에 몰려 덴노지 성채에서 농성하였다. 노부나가는 음력 5월 5일 와카에 성에서 동원령을 내려 모인 3천여명을 이끌고 음력 5월 7일 이른 아침, 덴노지 성채를 포위하고 있는 이시야마 혼간지 문도 1만5천여명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덴노지 성채 전투). 노부나가 자신도 부상을 입는 등 격전이었지만, 성채에 있던 오다 군도 협공을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후, 오다 군은 이시야마 혼간지를 포위하여 병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음력 7월 13일 이시야마 혼간지의 원군인 모리 수군에게 오다 수군은 패배하였고, 이시야마 혼간지는 모리 가문으로부터 병량과 탄약을 보충받았다. (제1차 기즈 강하구 전투)
이 무렵, 에치고 국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과도 관계가 악화되었고, 덴쇼 4년(1576년) 겐신은 이시야마 혼간지와 화친하며 노부나가와의 동맹관계를 파기하였다. 겐신을 맹주로 모리 데루모토, 이시야마 혼간지, 하타노 히데하루, 기슈의 사이카 무리등이 동조하여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다.
덴쇼 5년(1577년) 음력 2월 기슈 사이카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지만, 모리 수군의 원조와 겐신의 노토 침공으로 했기 때문에 음력 3월 형식적으로 사이카 무리의 수령 사이카 마고이치와 화친하고 기이에서 철퇴하였다.
한편, 겐신의 공격을 견디고 있던 노토의 나나오 성의 친노부나가 파는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3만 대군을 선봉부대로, 자신이 이끄는 본대 1만 8천을 후위부대로 출진하였다. 그러나, 음력 9월 15일 나나오 성은 함락되었고, 음력 9월 23일 선봉부대인 시바타 군은 데토리 강 전투에서 참패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노부나가는 겐신과의 충돌을 피해 아즈치로 귀환하였다.
노부나가가 궁지에 몰린 것으로 본 야마토 국의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겐신에 호응하여 거병하였다. 히사히데의 모반을 알아차린 노부나가는 가가 국에서 철병하여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한 군을 시기 산성으로 급파해 음력 10월 진압하였다. (시기 산성 전투).
동월 노부나가에게 저항했던 단바 가메야마 산성의 나이토 사다마사가 병사하자, 즉각 가메야마 산성, 모미이 성, 사사야마 산성 등의 단바의 여러 성을 공략하였다. 덴쇼 6년(1578년) 음력 3월 13일 우에스기 겐신이 급사하였고, 겐신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채 죽었기 때문에 가문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 틈을 노려 오다 군은 우에스기 령의 노토, 가가를 공략하였다. 겐신의 죽음에 따라 노부나가 포위망은 붕괴되었다.
[편집] 오다 가문의 군단
- 호쿠리쿠 방면 - 시바타 가쓰이에 군단
- 나카센 방면 - 오다 노부타다 군단 (다키가와 가즈마사 군단)
- 기나이 방면 - 아케치 미쓰히데 군단
- 주고쿠 방면 - 하시바 히데요시 군단
- 시코쿠 방면 - 니와 나가히데, 오다 노부타카 군단 (1582년 결성)
- 혼간지 방면 - 사쿠마 노부모리 군단
- 도카이도 방어 - 도쿠가와 이에야스 (단, 도쿠가와 가문과는 동맹관계)
덴쇼기에 들어서면서 노부나가는 다방면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다. 수하 장수에게 다이묘급의 영지를 주어 주변을 공략하였다. 연구자 중에는 이들 신설 다이묘를 군단 또는 방면군 등으로 불렀다. 오늘날 일반서적에도 꽤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러한 명칭이 없었다.
겐신 사후, 뒤를 이은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해 시바타 가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삿사 나리마사 등으로 호쿠리쿠를 공략하였고, 다케다 가쓰요리에 대해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 다키가와 가즈마사, 모리 나가요시 등으로 시나노, 가이를 공략하였다. 단바의 하타노 히데하루에 대해서는 아케치 미쓰히데,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으로, 주고쿠의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서는 하시바 히데요시 등으로, 셋쓰의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해서는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오다 군은 겐신 사후, 우에스기 가문과의 전투에서 노토, 가가를 탈환해 엣추를 공략하였다.
덴쇼 6년(1578년) 음력 3월 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가 모리 가문과 결탁해 모반을 일어킨다. 동년 음력 7월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필두로한 아마고 가문 부흥군의 고즈키 성이 모리 가문에 함락되어 아군을 잃었다. 동년 음력 10월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가 모반해, 이시야마 혼간지와 결탁 노부나가에 대항하였다. 한편, 무라시게와 동조했던 셋쓰 동부의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시게토모는 오다 군의 공격과 협박에 의해 항복하였다.
동년 음력 11월 6일 제2차 기즈 강하구 전투에서 모리 수군의 대패하였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아라키 무라시게를 도울 수 없었다. 덴쇼 7년(1579년) 여름 단바의 하타노 히데하루는 항복하였지만, 처형되었다. 동년 음력 9월 아라키 무라시게는 처와 자식을 남겨둔채 아리오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아리오카 성은 함락되었고, 아리키 일족은 대부분 처형되었다. 동년 음력 10월 비젠 국의 우키타 나오이에가 모리 가문을 이반해 오다 가문에 복속하자, 전황이 역전되었다. 덴쇼 8년(1580년) 벳쇼 나가하루는 성안의 병사와 영민의 안전을 조건으로 개성하였고, 자결하였다. (미키 전투). 또, 혼간지에 있어서도 동년 음력 4월 오기마치 천황의 칙령으로 유리한 조건에 화친하였다. 조건에 따라 혼간지는 오사카로부터 퇴거하였다. 이로써 하리마를 비롯 단바, 셋쓰를 평정하였고, 덴쇼 9년(1581년)에는 이나바의 돗토리 성을 비롯 아와지로의 이와야 성을 공략하였다.
덴쇼 7년(1579년) 이세의 지성구축을 방해한 이가의 호족에 화가 난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독단으로 이가 국을 공격했지만, 대패하였다. 노부나가는 노부카쓰을 엄하게 질책하고, 이가 호족에 대한 적의를 품었다. (제1차 덴쇼 이가의 난). 그리고, 덴쇼 9년(1581년) 노부카쓰를 총대장으로 6만의 군세로 이가를 공략하여 오다 가의 영지로 삼았다. (제2차 덴쇼 이가의 난).
덴쇼 7년(1579년), 노부나가는 도쿠가와의 적장자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 그의 어머니 쓰키야마도노에 대해 죽음을 명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사위인 노부야스에게는 12개조 난행을 들었고, 쓰키야마도노에 대해서는 다케다 가쓰요리와의 내통 등을 들었다. 이에 도쿠가와 가신들 사이에는 노부나가 공순파와 반노부나가 파로 갈라져 격논이 오갔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 사람의 자결을 명하였다. 단 이에 관해서는 이설도 있다.
덴쇼 8년(1580년) 음력 8월 노부나가는 후다이 가신 사쿠마 노부모리와 그의 적장자 사쿠마 노부히데에 대해서 혼간지와의 전투에서 무사안일로 넘어갔기 때문에 추방하였다. 더욱이 하야시 히데사다, 안도 모리나리는 옛적에 모반을 꾀했다는 것과 그의 친지들이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추방하였다.
[편집] 다케다 정벌
덴쇼 9년(1581년) 음력 2월 28일 교토에서 열병식을 했다. 이 때, 오기마치 천황을 초대하였고, 여러 귀족들도 참석하였다. 일종의 무력 시위였다.
동년 음력 5월 엣추를 지키고 있던 우에스기 무장 가와다 나가치카가 급하한 틈을 노려 오다 군은 엣추로 진군해 엣추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동년 음력 3월 23일 도쿠가와 가문도 다케다 가문의 다카덴진 성을 탈환하는 등 다케다 가문을 압박하였다. 또, 기슈에서도 사이카 무리의 내부분열로 노부나가를 지지하는 스즈키 마고이치와 반 노부나가 파의 도바시 히라쓰구 대립이 격하되는 등 세력이 약화되었다.
동년 아라키 무라시게의 잔당을 은닉해 주거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내통하고 있던 고야 산의 문도들과 대립하였고, 게다가 노부나가의 사자 10여명을 살해하였다. 이에 격노한 노부나가는 고야 산의 문도 수백명을 체포하였고, 가와치와 야마토의 여러 다이묘에 명하여 고야 산을 포위하였다.
덴쇼 10년(1582년) 음력 2월 1일 다케다 가쓰요리의 매제 기소 요시마사가 신부 성의 축성에 따른 과도한 요구에 불만을 품고 노부나가 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계기로 음력 2월 3일 동원령을 노부타다에게 명하였다. 그리고, 다케다 령을 공략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루가에서, 호조 우지나오는 간토에서, 가나모리 나가치카가 히다에서, 노부타다 자신은 기소에서 다케다 령으로 진격하였다. 그 수는 10만여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케다 군은 여러 호족이 노부나가에 항복하고, 더욱이 다케다 일족인 스루가 에지리 성주 아나야마 노부키미 등이 주요 무장이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다케다 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한채 패배하였다.
음력 3월 5일 노부나가는 아즈치를 출발하였고, 음력 3월 8일 노부타다는 고후를 점령하였다. 음력 3월 11일 덴모쿠 산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노부카쓰 부자는 자결하였다. 다케다 가문 멸망 후, 노부나가는 다케다 잔당 토벌을 명하였다.
다케다 령의 배분에서는 스루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고즈케를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가이를 가와지리 히데타카에게, 시나노 북부를 모리 나가요시에게, 시나노 남부를 모리 나가히데에게 주어 호조 우지나오의 호조 세력을 저지했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신겐과 겐신에게 했던 것처럼 평화외교를 하여,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편집] 혼노지의 변
덴쇼 10년(1582년) 여름, 노부나가는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공략하기 위해, 3남 간베 노부타카와 중신 니와 나가히데의 군단을 준비시킨다.
동년 음력 5월 15일 맹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즈치로 초대한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접대역으로 맞겼다. 미쓰히데는 15일에서 17일에 거쳐 이에야스를 격진이 대접하였다.
이에야스에 대한 접대가 한창인 무렵 하시바 히데요시의 사자로부터 원군을 요청받는다. “모리 측에서 대군을 이끌고, 다카마쓰 성으로 구원할 조짐이 있습니다.”라는 보고였다.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히데요시의 원군을 명하였다. 이 때, 미쓰히데의 접대내용에 불만을 품은 노부나가가 고쇼인 모리 란마루에게 미쓰히데의 머리를 치도록 시켰다고 했다. 이 같은 속설은 에도 시대 이후 유포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음력 5월 29일 모리 원정 출정에 대한 준비를 위해 상경하였고, 혼노지에서 숙식하였다. 다지만, 원군으로 보내질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이 돌연 교토로 진입하였고, 음력 6월 2일 혼노지를 급습하였다. 이 때, 수하 부하들이 노부나가의 신뢰가 두터워,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가 적었기 때문에, 혼노지를 급습하기 전까지 목표가 노부나가가 있는 혼노지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1백명 정도의 호위군 밖에 없었던 노부나가지만, 스스로 창을 가지고 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압도적 병력차 때문에 수세에 몰렸고, 노부나가는 처소로 돌아가 불을 질렀다. 그리곤 불속에서 자결하였다. 향년 49세였다. (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위 아케치 히데미쓰가 노부나가의 사체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노부나가와 비슷한 승려를 주변에 배치했기 때문에 누군지 모른채 매장했다는 설도 있다. 또, 흑인 용병 야스케는 혼노지 변에서도 마지막까지 노부나가와 동행해 싸웠다고 한다. 미쓰히데에게 잡혔지만, 풀어주었다고 한다.
2007년에 행해진 혼노지 터의 발굴조사에서 혼노지 번과 동 시기에 있던 해자 터와 대량의 기와가 발견되어, 혼노지가 성채였고, 모반에 대비했다는 지적도 있다.
[편집] 인물
[편집] 성격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란 시구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시구는 노부나가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히라도 번주 마쓰라 기요시의 수필 《갑자야화》에 수록된 것으로 작가 미상의 시구이다. 또, 이 시구에 계속해 《울지 않으면 새장으로 보내겠다. 두견새》란 부분도 있어, 센고쿠 시대의 무장들에 비해 에도 시대 쇼군은 그다지 기골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시구는 노부나가의 성격보다도 그의 결단력과 기계를 평가하는 시구인 것 같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아자이 히사마사, 나가마사 부자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3인의 두개골에 금칠하여 연회 때 그 일을 널리 알렸다.라고 기록되있다. 이를 잔 대신으로 사용되어 가신들이 그 잔에 든 술을 마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후세 소설가의 각색이고, 실제 사용되지 않았다. 해골에 하쿠다미[5]를 한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나타낸 것이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인물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장신에 마른 채격으로 수염이 적다. 목소리는 꽤 큰 편이며 항상 무예를 좋아해 천하고 상스럽다. 정의롭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오만하고, 명예를 존중한다. 결단력에 재능이 많고, 전술에 치밀함이 있지만, 규율을 지키지 않고, 부하의 진언을 대부분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신 이외의 다이묘 대부분을 경멸하고, 마치 자신의 부하 다루듯 말한다. 좋은 이해력과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과 부처 등 우상을 경시해 점은 일체 믿지 않는다. 명의상 법화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조물주, 영혼 불멸, 사후 세계 등의 존재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사업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공명에 최선을 다한다. 사람과 대화할 때 둘러 되는 것을 싫어한다.”
세간의 평판을 중시하고, 항상 올바른 싸움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부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은 교토 귀족 등의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편집] 일부 가혹한 행동
노부나가가 행한 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옛 권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당시 단행되었던 정책에 관해서 비난이 많다. 이 때문에 광기의 혁명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단, 이와 같은 비난에 관해서는 노부나가 사후에 오다 가를 계승한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정보조작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경계하였고, 냉대 하였지만, 그들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오다 가문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를 볼때 노부나가 사후에도 영향력이 컸던 것 같다.
당시 종교 세력이 속세의 권력과 하나가 되어 종교 본연의 의의를 망각한 일과 승려들의 부패 등을 감안해 볼 때 노부나가의 불교 탄압을 좋게 보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중기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그 일이 잔인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승려의 폐단을 없앴다. 이것 또한, 천하의 공을 세운 큰 일중 하나라고 봐야한다.”라고 평했다.
자보즈[6]의 일처리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고, 이에 노부나가는 격노하였다. 자보즈는 자신에 미칠 화를 두려워하여 선반에 숨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선반과 함께 자보즈를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자보즈를 벨 때 베는 맛이 좋아 사용된 칼에는 헤시키리[7] 하세베[8]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겐키 원년(1570년) 음력 5월 6일 스기타니 젠주보라는 조총의 명수가 노부나가를 암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덴쇼 원년(1573년) 젠주보를 잡혀 왔다. 노부나가는 젠주보를 머리만 나오게 흙에 묻어 생매장 하고 무딘 대나무 톱으로 그의 목을 썰어 고통속에 서서히 죽였다. 덧붙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다케다 가쓰요리와 내통한 자신의 가신 오가 야지로를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에도 시대에는 형벌중의 하나였다.
덴쇼 3년(1575년) 음력 11월 미노 이와무라 성을 함락한 후, 개성 조건을 무시한 채 적장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오쓰야노 가타를 비롯 5명을 나가라 강변에서 거꾸로 매달아 찔러 죽였다. 오쓰야노 가타는 오다 노부나가의 숙모였다.
덴쇼 6년(1578년) 기나이의 고야 산의 문도 1383명을 포박해 살해하였다. 이는 고야 산의 문도들이 밀정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덴쇼 6년(1578년) 음력 12월 13일 아마가사키 부근에서 아라키 무라시게 일족 부녀자 122명을 십자가에 매단후 찔러 죽였다. 더욱이 남자 124명 여자 388명을 4동의 가옥에 몰아 넣은 후, 불을 질러 죽였다.
덴쇼 10년(1582년) 음력 4월 10일 노부나가는 비와 호의 지쿠부 섬의 참배를 위해 아즈치 성을 출발하였다. 아즈치 성과 지쿠부 섬 사이는 좀 멀었기 때문에 당일로는 돌아가기 어려운 거리였다. 이 때문에 시녀들은 구와노미데라에 참배가거나, 마을에서 장을 보나거나 하여 아즈치 성을 비웠다. 마침, 노부나가는 그날 돌아왔으며, 시녀의 외출을 안 노부나가는 격노하였다. 시녀들을 참살하였다. 이때, 시녀들의 구명을 탄원한 구와노미데라의 주지도 살해하였다. 단, 구와노미데라에는 이 때 살해되었다는 주지의 기록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이후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죽이지 않았다. 또, 문헌에 죄를 물어 처벌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시녀들을 살해했다는 기록은 없다.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에 대해 행한 행동은 대부분은 당시 시대상황상 학살이라기보다 오히려 보통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센고쿠 시대를 조기에 끝을 맺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노부나가가 행한 처형방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 여러 다이묘도 했었다.
덴쇼 5년(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비젠, 미마사카, 하리마 국경 부근에서 여자, 어린아이 200명 이상을 꼬챙이에 꽃아 죽이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지금도 이 부근은 지옥골짜기라고 불리고 있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등도 인신매매를 하는 등, 노부나가가 한 행동 역시 특별히 보기 드문 일은 아니였다. 이와 같이 당시 상황과 도덕 기준을 생각해 그의 행동을 평가해야 한다.
[편집] 초상화
아이치 현 도요타 시의 조코지에 노부나가를 그린 그림이 있다. 그 외에도 유럽의 화가가 실사한 초상화라고 전해지는 그림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사진을 보면 진한 눈썹에 날카로운 큰 눈, 높은 코, 다물어진 입, 긴 얼굴 윤곽과 수염 등이 특징이다. 단, 이 초상화에 관해서는 사료적으로 뒤받침이 되지 않아, 메이지 시대 행해진 현창사업 때 작성된 것이라고도 한다. 노부나가의 청년 무렵에는 여자로 잘못 볼 정도로 미소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키는 약 170cm 정도에 500m 앞에서도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또, 혈흔과 남겨진 수염으로부터 혈액형 감정을 했었다. 그 결과 A형이라고 하지만, 신빙성이 낮아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편집] 교우관계
신분에 관계없이 서민들과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실제 서민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노동요를 부를 때에는 모습을 서민들 앞에 드러냈다. 오봉 때에는 마을 주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마쓰리를 즐겼던 것 같다.
상경 이후 조정등의 귀족계급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구게와도 친교가 깊었다. 특히 고노에 마에히사와는 애당초 적대 관계였지만, 취미 등이 같아 잘 어울였다고 한다.
당시 다른 센고쿠 무장과 같이 남색을 즐겼다. 고쇼인 마에다 도시이에, 호리 히데마사, 모리 란마루 등과 관계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또,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측실을 조금밖에 두지 않고 대신 많은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편집] 서양문물의 관심
서양문물에 관심이 깊어, 교토에서 열린 열병식 때 벨벳으로된 외투에 서양 모자를 쓰고 참가하였다. 만년에 전장에 나갈 때면 서양식 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 알레산드로 발리그니아누의 노예였던 흑인에 흥미를 나타냈고, 그를 양도 받아 야스케라고 부르며 측근으로 삼았다.
예수회에서 받은 지구의, 시계, 지도 등을 잘 이해했다고 한다. 호기심이 강해 조총이 일반적이지 않을 무려에 화승총을 사용하였다. 기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상생활과 별반 다를게 없다고 본 것 같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아즈치 성을 그린 병풍도을 선물하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 1585년에 도착했다고 한다. 더구나 이 병풍도는 분실되었다.
[편집] 문화에서의 관심
바둑, 고와카마이를 좋아하고, 사루가쿠 (노 (연극))를 싫어하였다. 고와카마이의 아쓰모리 중 《인간 오십년 돌고 도는 인간세상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자 그 누구인가, 죽지 않을자 그 누구인가》(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이란 대목을 특히 좋아해서 자주 춤을 추었다고 한다.
스모를 매우 좋아해서, 아즈치 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대회를 자주 열었다. 또, 스모 대회는 신분과 관계없이 노부나가의 측근과 서민들이 섞여 스모를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수영,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등 신체와 무예를 닦았다. 바둑에도 취미가 있어, 바둑에서 사용되는 명인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을 제압한 뒤, 쓰보우치라는 이름을 가진 미요시 가문의 요리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 때, 노부나가는 쓰보우치에게 “요리를 잘하면, 죄를 사하고 요리사로 고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쓰보우치가 만든 요리를 노부나가가 먹었지만, “음식이 싱겁다.”라며 쓰보우치를 처형하려하였다. 그러나, 쓰보우치는 1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나온 2번째 요리의 맛을 본 노부나가는 “매우 맛있다.”라며 수긍하고, 고용하였다. 그 후, 쓰보우치는 “애초에 2번째 요리를 내왔으면 좋았잖아.”라는 물음에 “처음 요리는 교토의 고급요리였고, 나중 것은 맛이 강한 시골요리였을 뿐이다. 결국 노부나가님도 시골사람이란 말이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후일 이 이야기를 들은 노부나가는 “나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상, 내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먼저 노력을 해야되는 것이 가신이 된자의 본분이다. 그것을 게을리 한다면,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편집] 천하포무의 기반
노부나가의 오다군이 일본에서 파죽지세로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먼저 노부나가가 유년기부터 조총에 관심이 많고, 독학으로 사격술을 익히고, 이후 자신만의 조총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되어 군에 바로 적용하여 훈련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보병인 창병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과 다케다가와 우에스기가의 기병술 이마가와가의 궁술로 중세의 일반적인 전술을 보여주었다. 물론 당시 일본 관서지역을 중심으로 총이 유럽에서 수입이 되었지만 사격 조준유지의 어려움과 무게, 그리고 사격후 대기시간과 사격전 대기시간등을 이유로 활성화 되지 못하였으나, 노부나가는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개량하여 오다가 만의 총을 제조하고, 사격전후 대기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3오횡대로 정열하여 사격을 하여 그 공백시간을 없애는 등의 신전술로 쉽게 정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신속함을 항상 강조해왔기 때문에 적이 안심하는 시간 내에 소수병력을 먼저 이끌어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본대를 끌여들여 승리를 취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민심을 정확히 파악했기에 오와리 다이묘때부터 혁신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먼저 절의 통행세를 철폐하고 다른 지방의 사람들에게도 오와리에 오는데 세금을 받지 않고, 상업을 적극 장려하여 자신의 영지를 정보와 경제,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서 민심을 확보하였으며, 영지내에 자신의 군사들이 대민 물의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극형을 처하는 등의 강력한 규제로 치안을 확보하였다.
[편집] 천하인, 그 달콤한 중독
노부나가의 우다이진 제수는 충격적일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의 관직은 일본조정내의 귀족 출신의 관료들끼리의 행사로써 자리자체도 큰 힘이 없을 뿐더러, 출신 성분에 맞는 자리를 제시하였는데, 노부나가는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 되어 군벌의 위로 올라가 아시카가 막부의 재탕을 원하지 않고 우다이진이 됨으로써 지방군벌에서 중앙세력이 되고 일왕의 명을 받는 세력이 되어 명분을 얻게 되었다. 또한 세이다이쇼군은 옛 겐지가문(原氏)의 전유물로써 겐지가문과 관련된 가문들만이 오를 수 있던 자리였고, 당시 일본내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기에 당시 겐지가문의 혈통은 아시카가가(足利家), 호죠가(北條家), 마쓰다이라가(松平家=德川家),다케다가(武田家)정도였으며, 노부나가는 겐지와는 원수가문인 헤이지(平氏)가문이었다. 우다이진의 자리에 오른 후 스스로 자신은 조정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권력강화를 위한 숙청을 시작하여 미요시가,롯카쿠가등 아시카가 막부를 배신한 가문들을 멸문시키고, 자신의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할복강요가 주 예임) 혼노지의 변에도 노부나가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를 아케치가의 가신들 앞에서 대망신을 주는 등의 감정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불만을 키우게 되는 계기를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천하인의 호칭 이후 지나친 충성도의 시험과 잔인한 처결 측근들의 정치적인 기반 상실등을 자꾸 야기시켜 죽음을 재촉한 결과가 되었다. 허나 그의 전국시대 말기의 대내외적인 업적으로 문화도 발달하여 오다노부나가/토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약했던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다이쇼군으로 올라 에도바쿠후를 열기전까지를 아츠지 모모야마 시대라고 칭한다.
[편집] 노부나가의 성공 이유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성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9].[10]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 도입과 개량 그에 따른 독자적인 전술개발하여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다. 또한 철저한 실력위주로 인재를 관리하였는데, 농민출신의 하급무사인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발굴하였고, 하급무사 출신의 마에다 토시이에와 닌자출신의 다키가와 카즈마쓰 등 낮은 신분의 부하라도 실력이 있으면 중용하였다. 그리고 배반전력이 있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포용하는 등 인재를 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