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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

오꾼 2013. 12. 24. 15:20

선사시대를 거쳐 11세기경 호족들이 오키나와 각지역을 지배. 14세기 중반 남산,중산,북산의 3개의 작은 소국가가 성립. 이 삼산은 세력 싸움을 계속하다가 1429년 남산의 쇼하시에 의해 통일되어 이때부터 류큐왕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통일된 류큐왕국은 독립국으로서 중국과의 진공무역을 하고 지리적인 위치를 살려 일본,조선,동아시아등 중계무역을 통해 해양왕국으로 번영한다.

하지만 1609년 일본 에도막부의 명령으로 사쯔마번(현재 가고시마)이 오키나와를 침략하여 속국으로 만들고 에도막부는 류큐왕국을 유지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막부 통제하에 중국과의 진공무역을 지속시키며 막대한 이익을 착취하였다.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들여온 문물은 사쯔마번을 통해 일본전국으로 보급되었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쯔마이모 고구마이다.

결국 류큐는 형식적으로는 중국과 책봉관계에 있었고 실질적으로는 새롭게 일본 도쿠가와막부의 통치를 받는 2중지배를 받는 꼴이 되었다.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새로 정권을 잡은 근대화된 메이지신정부는 무력으로 슈리성을 장악한다음 류큐왕을 폐하고 일본의 한지역 오키나와현이 설치되고 메이지정부에의해 군대가 파견되어 1879년 류큐왕국 멸망. 이로서 450년간 이어온 류큐왕국은 멸망하고 류큐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일본령이 된다. 하지만 중국이 류큐정복을 인정하지 않아 1880년 일본,중국 간의 교섭이 시작되는데 중국측은 종주국의 입장을 주장하였고 일본측은 실효지배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오키나와 본섬 북쪽을 일본령으로 하고 미야코제도,야에야마제도를 중국령으로 2등분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중국측은 류큐를 독립시켜 류큐왕국을 다시 부활시키고 북쪽은 일본령으로, 류큐본섬의 남쪽인 미야코제도, 야에야마제도를 중국령으로 3등분하자는 제안을 했다. 교섭결과 중국이 일본안을 받아들이는것에 동의하고 나머지 조인만 하면 되는 상황이였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후 류큐는 자연스럽게 일본령이 되었다.

1941년 일본군이 미국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미일간의 태평양 전쟁이 발발.

1945년 태평양전쟁말기 일본은 본토방위의 준비가 완료될때까지 시간벌기용 작전으로 오키나와의 요미탄,챠탄,이에섬에 비행장을 만들고 미국과의 전쟁에 대비한다. 미국과 지상전을 벌여 오키나와 주민 1/4 이 희생되는 비극을 격는다. 이때 미국은 일본본토 침공의 발진기지를 확보하기위해 거대병력 54만명을 투입했다.

민간인 만14~70세의 남자들과 여학생들도 의무대로 강제동원 되었다.

1944 1010 미군 최초의 공습이 시작되고 400대의 미군전투기가 오키나와 전역에 폭탄을 떨어트렸다. 이로인해 슈리성 등 귀중한 역사, 유적지 등이 불타버리고 초토화된다.

일본군은 처음에는 미군 해안상륙을 저지하기위해 전투계획을 세웠지만 병력이 부족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본토의 방어시간을 벌기위해 지하반공호에 들어가 싸우기로 작전을 변경한다. 미군이 쉽게 무혈입성후 제일먼저 요미탄,챠탄,이에섬의 비행장을 점령한다.

궁지에 몰린 일본군으 1945년 6월23 남부 지하반공호에서 전원 자결. 미군은 1945년 7월2 오키나와전 종료를 선언하였다. 이로서 오키나와전투는 끝나고 한달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투하로 일본은 항복을 한다. 오키나와 사상자는 총20만명으로 주민이 12만명, 미군이 12천명, 일본군이 55천명,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이 약1만명으로 군인보다 오키나와 민간인 사상자가 훨씬많은 것이 오키나와전투의 특징이다. 더욱 참혹했던 것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집단자결사건이다. 전쟁을 피해 사람들은 동굴로 숨었고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포에 휩싸인다. 교육을 철저히 받은 일본군은 한번도 미국인을 본적이 없는 순진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만약 미군에게 항복하면 여자는 강간한후 처참히 죽이고 남자는 탱크로 밀어 죽이거나 사지를 잘라 처참하게 죽인다고 거짓정보를 주면서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스스로 자결하라고 강요하였다. 결국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집단자결이라는 비극이 벌어진다.

그리고 결국 일본이 패전하고 미군은 승자의 군대 점령군으로서 오키나와를 일본본토로부터 분리시키고 눌러 앉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오키나와내 미군기지가 전후 처음으로 다른나라 공격의 출격기지로서 사용된 후 한국전쟁에 이어 1963년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까지 또 다시 미군출격기지로 이용되는 등 오키나와는 동아시아 안보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 거점지역으로 그 중요성이 한층 더 부각되어 지금 현재 미군기지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후처리를 두고 미일간 강화조약을 맺는데 오키나와를 미국에게 주고 일본은 독립국으로 회복한다는 조건이였다.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다시 분리되어 1972년 일본으로 다시 반환할때까지 27년간 사법,입법,행정을 가진 미군의 통치를 받는다. 이때는 일본에서 오키나와에 올때도 여권이 있어야만 왕래가 가능했고 미국달러가 통용되었고 도로통행도 한국과 미국처럼 같은 주행이였다. 또한 일본 최초로 페스트푸드 햄버거와 콜라가 들어와 오키나와인의 식생활에 큰 영향을 주게된다.

1953년 미군은 토지수용령을 발령하고 오키나와 주민들과 합의없이 강제로 토지접수를 강행하여 극동최대의 미군기지를 구축한다.

하루아침에 집과 토지를 뺏긴 오키나와 주민에게 처음에는 1회보상으로 끝냈으나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미국정부에 직접 소송단을 파견하는등 끊질긴 투쟁으로 결국 1958년부터 매년 군용땅값을 지불받기로 합의한다.

1964년 베트남전쟁,아프간전쟁,이라크전쟁 때에도 공격발진기지로 이용되었다.

1969년 일본의 사토 수상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밀약으로 오키나와를 일본으로 반환하는것에 합의한다. 미국이 오키나와 지주에게 지불해야하는 반환지 원상회복지 400만달러를 극비리에 일본이 떠맡는 조건으로

1972년 오키나와는 27년간의 미국통치가 끝나지만 아직도 미군기지 이전문제로 일본정부와 갈등을 겪고 있다. 현재 미군기지를 제외하고 일본으로 다시 반환되어 현재는 일본 최대의 휴양지로 각광 받고있다.

일본본토에서 이주해온 일본인이 아닌 순수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느나라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인이라고 대답하지않고 오키나와인, 류큐인 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